미국 AI 영상 생성 스타트업 힉스필드(Higgsfield)의 기업가치가 올해 1월 13억 달러에서 8개월 만에 54억 달러로 뛰었다. 지난 8월 마무리된 4억 달러 규모 시리즈B에는 한국 미래에셋캐피탈이 투자자로 참여했다. 이 라운드를 계기로 힉스필드는 아시아 첫 거점으로 서울을 선택했고, 지난 5월 서울에 부임한 김민성 아시아태평양(APAC) 디렉터가 국내 첫 인터뷰에서 그 배경과 전략을 밝혔다.

4억 달러 시리즈B, 54억 달러 밸류의 근거
힉스필드는 연환산 매출(ARR) 7억 달러, 238개국 3000만 명 사용자, 포춘 500대 기업 중 390곳 도입이라는 지표를 바탕으로 이번 밸류를 인정받았다. 회사는 자체 파운데이션 모델을 개발하는 대신 바이트댄스의 시댄스, 콰이쇼우의 클링, 오픈AI의 소라, 구글의 Veo 등 영상 모델 7종과 이미지 모델 4종, 총 11종의 외부 모델을 플랫폼 위에서 통합 제공하는 오케스트레이터 전략을 택했다. 김 디렉터는 “한국이 인공지능(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자체에서는 글로벌 빅테크에 비해 다소 늦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모델을 활용하는 역량에서는 한국이 세계 1위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왜 서울이 아시아 첫 거점인가
힉스필드가 한국을 택한 이유는 시각 콘텐츠 의존 산업의 밀집도다. 김 디렉터는 “K팝, 드라마, 광고, 웹툰까지 시각 콘텐츠에 의존하는 산업들이 촘촘하게 연결돼 있고, 이 산업들이 이미 글로벌 플랫폼을 겨냥해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해외 진출을 전제로 한 시각 콘텐츠 수요가 원래 높은 나라인데 여기에 생성형 AI가 제작 속도의 병목을 풀어주면서 채택이 급격히 빨라졌다”고 덧붙였다. 힉스필드는 지난 6월 국내 광고·마케팅 그룹 FSN 계열사인 부스터즈, 애드쿠아에 제품을 도입시켰고 8월에는 코엑스 AI 서밋에 참가해 국내 접점을 넓혔다.

기업 도입, 얼리어답터에서 대기업으로
힉스필드는 슈퍼컴퓨터(Supercomputer)라는 자동화 제품으로 목적에 맞는 모델 선택을 대신해주고, 기업용 광고 소재 생성 도구인 마케팅 스튜디오(Marketing Studio)를 통해 상업적 수요를 흡수하고 있다. 마케팅 스튜디오는 공개 후 첫 30일 동안 마케터 6만8000명을 모았고, 현재 6개 대륙 1만2000여 개 기업이 사용 중이다. 전체 활동 중 상업 광고 비중은 70%에 달한다. 김 디렉터는 “게임, 전자, 커머스, 콘텐츠 제작 스튜디오, 패션까지 계약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며 “최근에는 컴플라이언스와 법무 검토까지 필요한 대기업급 문의가 늘고 있는데, 시장이 얼리어답터의 실험에서 대기업의 정식 도입 검토로 단계가 넘어가고 있다는 신호로 본다”고 밝혔다.

시장 규모와 오케스트레이터 전략의 승부처
그랜드뷰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AI 영상 생성기 시장 규모는 9억4600만 달러, 편집·워크플로까지 포함하면 메티큘러스리서치 기준 36억7000만 달러다. 2036년에는 248억9000만 달러까지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15년 넘게 마케팅 업계에 있었던 김 디렉터는 “측정 데이터를 들여다볼수록 확인하게 된 건 크리에이티브 자체가 성과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라는 사실이었다”며 “성과는 매체 집행이나 타겟팅보다도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에서 갈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여러 모델을 통합한 전략의 강점은 트렌드 변화에 대한 대응력이다. 그는 “지난해에는 나노 바나나 프로가 대세였고 올해 초는 클링, 지금은 시댄스가 인기”라며 “특정 원 모델사 하나에 고착화되어 있으면 트렌드가 바뀔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글로벌 플랫폼은 수백 개 국가와 수많은 산업군을 동시에 상대해야 해 구조적으로 표준화된 형태로 갈 수밖에 없다”며 “이게 글로벌 솔루션이 지는 지점이라면 지는 지점이다. 특히 아시아 국가에서는 그렇다”고 한계도 인정했다.
힉스필드가 자체 개발한 캐릭터·톤 일관성 유지 기술 소울(Soul)을 활용해 만든 AI 아이돌 키온, AI 걸그룹 제피어는 플랫폼 역량을 보여주는 쇼케이스였다. 제피어는 제작 기간 5일이 걸렸다. 김 디렉터는 “K팝이든 영화든 콘텐츠 시장에 직접 진출할 계획도 의향도 없습니다. 키온과 제피어는 이 플랫폼으로 실제로 무엇까지 만들 수 있는지를 증명하기 위한 자체 실험이자 쇼케이스였고, 상업적 목적을 위한 자체 제작을 계속 이어갈 계획은 없습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제작비 하락과 규제 대응이라는 변수
제작비와 제작 기간이 짧아진다는 점은 투자 관점에서도 눈여겨볼 변수다. 김 디렉터는 “AI 콘텐츠는 실패해도 되는 비용 구조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투입 기간이 짧으면 실패의 비용도 그만큼 작아집니다”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5일 만에 만들 수 있다는 건 제작의 병목이 사라졌다는 뜻이지 좋은 콘텐츠가 자동으로 나온다는 뜻은 아니다”라며 “모든 콘텐츠에는 결국 서사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지금까지 영상 제작 시장은 수준 높은 결과물과 생산성이 결국 자본의 논리에 비례하는 구조였다”면서도 “제작 과정이 간소화돼도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고 그것을 완성하는 역량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시장 확대에는 규제 대응도 과제로 남아 있다. 지난 1월 22일 시행된 한국 AI 기본법은 생성물에 대한 표시 의무를 요구한다. 김 디렉터는 “한국 AI 기본법이 요구하는 표시 의무 등 로컬 규제 대응은 검토하고 있고, 필요하다면 한국 시장에 한해 별도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제작물 활용과 법적 책임에 대해서는 “제작물의 활용과 그로 인한 법적 책임은 실제 제작 주체에게 있다는 것이 기본 원칙”이라고 말했다.
결국 힉스필드가 8개월 만에 몸값을 네 배로 불린 근거는 매출과 사용자 지표뿐 아니라, 시각 콘텐츠 산업이 밀집한 한국이라는 시장에서 얼리어답터를 넘어 대기업 도입으로 확장되는 신호에 있다. 후속 투자자와 시장이 주목하는 지점도 이 확장 속도가 얼마나 유지되느냐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